8월 6일 월요일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새로 글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 이전에는 글을 배워본 적이 없다. 요즘이야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다. 옛날처럼 학교 선생님들이 ’ ㄱ ‘기역, ’ ㄴ ‘ 니은, ’ ㄷ ‘디귿 한글 자음과 ’ ㅏ ‘ ’ ㅑ ‘ ’ ㅓ ‘ ’ ㅕ ‘ 한글 모음을 가르칠 필요도 없을 테다. 어린이집에서, 유치원 과정에서 조기교육으로 다 배워 초등학교 때는 읽고 쓰기에 씩씩해 졌을 테니까.
글쓰기는 작문(作文)을 의미한다. 단순히 무언가를 쓰는 행위를 가리키는 필기(筆記)와는 다른 뜻이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남들에게 보여준 글쓰기를 시작하였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중학교 2학년 때 한글날을 맞아 사내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詩을 써내어 ’장원‘이라는 상을 받아 본 것이 나의 최초의 글쓰기가 될 것이다. 詩題가 ’겨울을 보는 마음‘ 이었다. 최초의 나의 시는 보관 부실로 온데 간데 없다. 다만 문학이라는 분야에 눈 뜬 시절이었고, 그 이후 국어시간이 재미있었고 국어선생님을 존경했던 기억이 있다.
’김재호‘ 선생님, 그 이는 시인이셨고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에......”로 시작하는 가곡 <고향의 노래>를 작사한 분이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국어선생님이 ’문학의 밤‘이라는 무대를 만들어 시 낭송회를 열고 내가 사회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도 졸시를 낭독하기도 하였는데 시는 남아있지 못하다. 연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시고 거제도에 국어선생님으로 갓 발령받아 오셨던 ’민병삼‘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셨다.
’민병삼‘ 소설가, 대표작에 <비둘기와 쥐두마리><장군 일 뿐이다>가 있다.
학교 대표로 ’郡內 예술제 백일장‘에 참가하여 시 부문에서 ’차상‘을 받았다. ’장원‘을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도 있다. 1967년 11월의 일이다.
“포연 (咆煙) ’이라는 詩였다.
어느날의 너는
아예 눈을 감고
戰爭을 빠져나오는 가느다란
餘音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歷史를 나누는 砲口의 나래는
한참이나 잘 키워져 있었지만...
바람을 흔들며, 바람길을 흔들며
가는 殘渣만은
흩어진 市京을 줏으며
거무데데한 그림자만 돌아서야 할
人間의 모습이었다
-어쯤 황무지를 찾는 肉聲으로 변하며
한 병사를 지키는 가느른 모습으로
먼, 먼 平和의 소식을 들으면
어디론지 여정을 차리는 숱한 傳說이어라
책장을 뒤져 그 옛날 詩作 연습으로 모아두었던 노트를 찾아 내었다. 표지가 거무데데하다. 이래저래 검은 줄이 그어져 있고 퇴고(推敲)한 흔적들도 있다. 꼭 잠들어있던 혼령을 깨운 것 같다.
일기쓰기를 하면서 <글 잘 쓰는 기술>이라는 책도 새로 들추어내어 읽어보고, <당신의 책을 가져라> 라는 책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나만 읽는 글이 아니고 혹시 내 일기를 남들도 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깨달음이 갑자기 머리를 쳤다. 잘 쓰여진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나도 문장을 좀 더 다듬어야겠다는 무거운 마음이 나를 들뜨게 하였다. 가슴이 열리기 시작했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책이 재미있었다.
가볍게 읽어도 되는 책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일본 작가가 쓴 ’감성 에세이‘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 작가의 진모습을 훔쳐 본 것같아 재미있게 읽었다. 훔쳐보는 것은 재미있으니까...
그는 나와 같은 1949년 생이라는 것, 취미가 여행이라는 것, 음악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솔직하다는 것 등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나는 소설 및 에세이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왔었다. 특히 장편소설은 별로 읽은 적이 없다.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는 말이 옳을 게다.
그나마 읽은 책들은 단편소설이나 시집 정도랄까, 먹고 사느라고 바쁜데 장편소설 및 두꺼운 전기(琠記) 따위를 읽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변명을 늘어놓기만 했다. 내가 가진 많은 책들 중의 대부분은 <위대한 기업>같은 경영 서적이거나, <피터드러커의 위대한 혁신>같은 혁신의 방법론, <일한다면 사장처럼> 같은 CEO 들이나 관리자들에게 사주고 싶은 책들이다. 실용 서적이 너무 많아 서가를 따로 두어 그 책들을 분류하여 정리하고 죽고 싶은 게 내 남은 과업이다.
오늘 아침 신문 <조선일보> 2018년 8월 6일 월요일, A21 문화면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 쓰는 법, 음악으로부터...“라는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안녕하세요.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라디오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머리가 띵~~했다고나 할까, 동갑내기인 하루키가 도코 FM방송 1일 DJ로 처음 진행하였다고 한다. 그의 성공을 시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설가가 방송에 나와 ‘왓 어 원드풀 월드’ (What a wonderful world) 등 9곡을 들려 주었다는 것에 감동 받았다는 이야기가 더욱 아니다. 영화 ‘굳모닝 베트남’에도 나오는 그 노래, 나도 너무나 좋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참전용사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나는 무엇하였는가’라는 의문이 나를 산 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누구인가’ 이다. ‘무엇하려 태어났으며 무엇을 하고 갈 것인가’ 라는 물음이 나를 돌아보게 하였으며, 입다물게 하였다.
이제 글 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재미있다. ‘먼저 쓰라. 그리고 당신을 믿어라‘ -’글 잘쓰는 기술’에서 인용.
글쓰기는 이렇게 배운다
-책을 읽는다. 영감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승은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글을 쓴다. 작문은 마라톤이나 클라리넷 연주 또는 벽돌쌓기나 농구 게임과 같다. 연습이 필요하다.
재미가 붙으니 속도가 난다. 그동안 구석에 쳐박아 두었던 글쓰기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낸다. 내가 보는 모든 것들, 만지는 것들, 듣는 것들, 심지어 아내가 곤히 자는 모습과 숨소리 조차 글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내의 아픔이 이렇게 나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살면서 마지막으로 生을 잘 정리하고 가라는 출발 신호처럼 ”탕~“하고 글쓰기가 내게 돌아 왔다.
언젠가 포연(砲煙)은 멈출 것이다. 아픈 아내에게도 평화(平和)가 돌아올 것이다. 어디론지 먼 여행을 떠날 것이다. 함께라면 더 좋을 것이다.
여행기처럼 일기 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글 잘 쓰는 기술> 바바라 애버크롬비 지음, 이민주 옮김, 브리즈, 2008
*<당신의 책을 가져라> 송숙희 지음, 국일 미디어, 2007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문학사상, 2018(신장판)
'유나에게 보내는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46. 내 고향 장승포 (0) | 2018.09.19 |
---|---|
45. 최초의 나의 수필 (0) | 2018.09.18 |
42. 동성판유리의 추억 (0) | 2018.09.15 |
28. 1-10-100의 법칙 (0) | 2018.09.05 |
21. 나의 삶의 원칙 (0) | 2018.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