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토요일
동성판유리는 일광에 있었다. 일광은 ’갯마을‘로 알려진 마을이다. 영화 갯마을 촬영지로 경남 양산군 일광면 이천리에 있다. 동성판유리는 유리만드는 공장이다. 일광천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좁은 신작로를 따라 가면 바다를 끼고 선 공장이 있다.
요즘은 일광해수욕장으로 갯마을축제가 해마다 열리고 있어 인근 사람들이 많이들 몰려온다고 했다. 특히 부산에서 가까워 해운대, 송정 만큼 유명지가 되었지만 그 옛날 사십여년 전으로 돌아가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작은 갯마을, 그 곳에는 모래알만큼 많이 옛추억이 쌓여 있다.
동성판유리에 입사한 것은 1975년 3월 4일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유리 부산공장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내가 이 공장에 입사한 것은 이십대 초반, 스무여섯살 때 일이다. 우리 가족이 몽땅 기장땅을 밟은 후였다. 고향인 거제도에서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남은 가재도구를 정리하여 고향을 훌훌 떠나 정착한 곳이 기장(경남 양산군 기장읍-지금은 부산시 기장읍)이었다. 내가 군에서 전역하고 이것저것 하던 일이 형편이 좋지 못하여 부모님 곁으로 돌아 온 것도 이때였다.
어머님이 주위의 소문으로 들은 ’동성판유리의 신입사원 모집‘에 ”니가 한번 가보아라, 대우도 좋고 괜찮은 회사란다“고 말씀하시어 큰 기대없이 응시하게 되었다.
누가 누가 응시했는지, 어떤 분들이 면접시험을 보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없다. 다만 내가 합격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입사 첫날, 잠시 기본교육을 받은 후, 배치를 위하여 몇가지 질문을 받았고 서무과에 배치를 받았다. 군대경력으로 행정 업무를 보았다는 것과 주산(珠算)을 조금 할 줄 안다는 것이 뽑힌 이유였다. 지금은 컴퓨터 시대이고, 주산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특별한 특기였으니까.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몇 개만을 골라 보겠다.
별난 상사의 일방적인 지시와 스트레스도 일광해수욕장의 해변 걷기와 칠암 횟집에서의 회식자리에서 날려버렸다.
특히 입사 3년차에 ’전문직 직분 전환시험‘에 사내에서 유일하게 통과되어 승진했던 일이 운명을 바꿔 놓았다. 고졸사원에게 대졸사원의 대우를 해주는 사내 ’과거시험 제도‘였다. 이 시험에 패스하면 직급체계를 전문직으로 대우하여 승진을 시켰다. 급여도 곱빼기로 올랐다. 자고나니 사내에서 유명한 놈(?)이 되어 있었다.
나를 유심히 보아왔던 경비 아저씨가 어느 날 나를 불러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 좋은 처녀가 있는데 선 볼 생각이 있으냐 등을 물어보고는 맞선을 주선하여 주셨다. 아내와의 만남은 운명처럼 내 인생길을 바꾸어 놓았다.
바로 서른 살이 막 넘어갈 때 였다. 연로하신 아버지가 기장땅에서 돌아가신 후 어머님께서는 다 장성한 아들이 걱정거리로 남았다. 이 놈이 장가를 가야 할 텐데...
맞선을 본지 채 한달도 안되어 결혼식을 올렸다. 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우리는 너무 자주 만났고, 사랑했고 다시 돌아나갈 길을 찾지 못했다. 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양쪽 부모님들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신랑의 나이 31살, 신부의 나이 24살 때 일어난 대사(大事)이었다.
급한(?) 나머지 1979년 1월 4일 시무식날 결혼식을 올렸다. 부산 서면 ’고려예식장‘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공장의 TOP이셨던 ’황선옥‘공장장님을 주례로 모셨다. 주례사를 너무 오래 하시는 바람에 하객으로 참석하였던 스무명도 넘는 내 우인(友人)들이 공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난리가 났었다 했다. 훗날 ’결혼식 하객으로 대단위 참석 불가’라는 웃지 못할 사내규칙이 생겨났다고 한다. (부산 서면에서 일광까지는 승용차로 약 1시간 이상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황 공장장님은 진정 하늘 같은 분이셨다. 나중엔 한국전기초자 구미공장 공장장, 부사장, 사장까지 지내신 전설같은 분으로 그 분과의 인연이 이후로도 길게 이어졌었다.
신입사원 연수 시에 유리를 생산하는 공정을 두루 돌아가며 실습을 하였었다. 한국유리와의 과당 경쟁으로 동성판유리라는 회사가 힘들어졌다고 했던 이야기. 그 당시 나라의 산업정책으로 두 회사를 합병하기로 하고, 동성판유리는 한국유리 부산공장으로 흡수 합병되었다는 이야기도 선배들이 들려주었다. 서무과에서 수습기간 중 나는 한국유리 사원이 아니고 ’한국전기초자‘라는 회사의 소속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몇 년후에는 경북 구미로 이전해 갈 것이라는 것과 ’한국전기초자‘라는 회사는 ’TV 브라운관용 유리 벌브‘를 생산하여 판매하는 한국유리 자회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었다.
신입사원으로 업무를 화선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이 배웠다. 동료들과의 퇴근 후 일상도 익숙해 졌다. 그러나 직장생활이라는 게 매번 재미있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짬짬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여 체신공무원으로 발령 받았던 일, 경쟁 회사였던 ’삼성코닝 수원공장‘에 스카웃될 뻔 하였던 일 등이 생각난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어제, 기장으로 오던 길에 동성판유리 공장 앞을 지나쳐 왔다. 창유리를 열고 바라본 공장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아마 폐업중인 모양이다. 소문에 의하면 유리공장도 생산성이 떨어져 중국에서 수입품이 늘어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한다. 함께 근무하였던 그 때 호랑이 이부장님도 불귀의 객이 되셨다고 했다.
정주고 지냈던 직장 동료들도 소식이 알 길 없다. 기다리던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으로 가던 길목에 피어있던 장미꽃들도 꽃잎지듯 떠나갔겠지, 세월은 무심히도 구름처럼 흘러 갔다.
한국전기초자 공장이 구미로 완전히 옮겨가기 전에 나는 선발대로 발령 받아 1979년 7월에 일광을 떠났었다. 아내도 신혼초라 절대로 떨어져 살아서는 안된다는 처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구미로 합류했다. 새로운 환경에 차츰 적응되어 갔었다. 구미에서의 생활은 수호천사가 있는 것처럼 잘 풀려갔다. (이 부분도 다시 이야기를 해야 겠다)
기장에 오니, 옛추억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십년이 금방이구나. 이렇게 저렇게 잘 살아왔구나, 참 요행으로 잘 살아왔구나 싶다.
장모님, 장인어른도 보이시지 않는다. 모두 하얗게 하얗게 흰 옷으로 갈아입고 먼 길 떠나셨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동성판유리는 내 마음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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