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시 31

백담사에서

백담사에서 -공광규 설악 푸른 벼랑에 걸린 달은 밝고 백담 흰 돌은 맑은 얼굴이다 밝은 달과 맑은 얼굴 내는 뜻은 천지신명에게 물으니 꾀꼬리가 가래나무 잎을 물고 가다 북천에 떨어뜨린다 공광규-1986년 월간 등단. 시집 와 산문집 외 발췌 , 에서 1쇄 발행일 2018년 04월 18일 지은이 무산 오현 펴낸이 윤영수 펴낸곳 문학나무 무산 오현 1932년 경남 밀양 출생 1958년 입산 1968년 시조문학에 봄, 관음기로 추천 등단 주요작품에 ,, 등이 있다. 1979년 첫 시집 출간, , , 등이 있다. 산문집 편저 등이 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이사장, 대한불교조계종 신흥사 조실, 대한불교조교종 원로위원, 대종사. 출가자로서의 수행정신과 불교의 가치를 알리는 시작 활동의 높은 경지인 '선시일여'의 삶..

다시 읽는 시 2021.11.24

늦가을 단풍

늦가을 단풍 -박상봉 내 나이 어느덧 해가 지듯 저물어간다 새벽 찬 서리에 기침 소리 잦아지고 돌아보면 외진 산길 울퉁불퉁 걸어온 인생 험한 세월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강바닥에 뒹구는 돌같이 살았다 한때 빛나던 시간 아름다운 색깔을 지녔으나 강물에 청벙 발 담그고 들어가 돌 하나 건져보면 어느 길에나 널린 평범한 돌덩이 까칠하게 만져질 뿐이다 새찬 빗줄기 맨몸으로 맞으며 뛰고 달리던 가슴이 펄펄 끓던 청년은 간 곳 없고 희어진 머리카락, 넉넉한 뱃살에 한숨짓고 눈물 떨구며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절로 고개 숙여지는 무르익은 나이 저만치 창가에 차오르는 햇살부터 느낌이 다르다 쨍하고 어수선한 한여름의 그것보다 어딘가 모르게 한풀 꺾인 뉘엿뉘엿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가을 지천명의 가을은 오..

다시 읽는 시 2021.11.17

세우다 -신인작품상

-전 유 자 날은 어두워지고 집에 그대를 위한 흰 식탁보를 깔아 놓았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빙판이 있고 미끄러지는 건 순식간의 일 다시 등불을 밝히려 합니다 눈을 치뜨며 밤의 덫을 놓을 때 바깥은 캄캄한 숲 절망처럼 헤쳐나가도 숲은 우물안의 일이죠 오늘 보았습니다 피뢰침이 창틀에 꽂혀 있고, 사연 실은 담쟁이가 거기를 조이고 있다는 걸 금 간 마음이 창문을 열고 말을 걸어봅니다 소금과 윽박으로 산 날을 보상받으려 했던 어린 오만의 날 당신, 피 묻은 가슴을 제게 널어 말리세요 나의 눈만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눈을 식탁위에 올려놓겠습니다 오세요, 밥 먹으러 -두레문학 신인 작품상 당선 작품 세우다 외 5편 -전유자 충남 서산시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석사 졸업 외국어대, 단국대, 명지대 시간..

다시 읽는 시 2020.09.30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

다시 읽는 시 2020.09.26

나를 슬프게 하는 詩들

- 안도현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80년대 시인들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90년대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본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만 보려고 하는 90년대적 세상 읽기 방식이 나를 슬프게 한다. 거기서 싹트는 새로운 상투성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 가며 보자. 때로는 그 따위 것들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자. 광장이 지겹다고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야 쓰겠는가.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 놓기만 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

다시 읽는 시 2020.09.24

이런 詩

- 신 동 엽 어깨에 잔뜩 힘을 준 詩 굳어서 뻣뻣한 詩 이런 詩가 손쉬워 사람들은 다들 좋아한다. 그럴 수도 있는 일 저마다 기호는 나름이니. 그러나 완전히 어깨를 푼 詩 비어서 비로소 가득한 詩 이런 詩를 낳기 위해선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 남아서 아내도 자식도 미리 다 보내고 시린 노을의 불을 쫓는 수리도 닮아 보아야 한다. 그리곤 순순히 돌아 미쳐 보아야 한다. 바이없는 종국의 잠이 내릴 때까지

다시 읽는 시 2020.09.17

매일초

-호시노 토미히로 오늘도 한 가지 슬픈일이 있었다 오늘도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평범한 일들이 있었다 -호시노 토미히로는 손이 아닌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가 된지 2개월만에, 방과 후 체육 동아리 활동을 지도하다가 경추손상으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되는 불운을 겪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목 위쪽뿐이었다. 그는 갑작 스런 사고로 생의 의욕을 잃고 절망에 빠져 한때 죽음까지 생각했지만, 다시 일어나 새 인생의 페이지를 열어 나갔다.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다. 그는 그림 을 그리고 그 위에 자작시를 적으..

다시 읽는 시 2020.09.15

입석은 자꾸만 기차를 흔든다

-김 연 화 미리 예매하지 못한 자리는 모두 입석이다 서울에서 구미까지 크고 작은 산들 틈으로 열린 철로는 강과 그 강물이 키운 들녘을 호령하며 간다 서서 보는 차창 밖 풍경 더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친구를 얻었다 풀리는 다리 힘 너머로 완강히 버티고 선 철교를 지날 때면 세상마저 흔들렸다 내 시선이 가닿은 옆자리 주인 일어서면서 "여기 좀 앉으세요" 하고 내 환절기 옷자락을 끌어당길 것 같은데 내가 감은 눈을 뜨면 그가 뜬 눈을 감는다 세 시간을 침목처럼 버텨온 다리로 남은 하루를 지탱해야 하는가 영법 泳法을 익히지 못했는데도 강을 건너는 오후가 부끄럽다 빈틈없이 앉은 사람들 가까울수록 먼 풍경을 그리는 것일까 또 하나 낯선 강을 건너는가 보다 철거덕철거덕 물결 소리로 강을 건너는 피로가 짐짝처럼..

다시 읽는 시 2020.09.15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던지시고, 평원에는 바람을 풀어줍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가득가득 하도록 명해주시옵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녘의 낮을 주시어, 무르익는 것을 재촉하시고 무거워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주소서, 이제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살 것이며, 깨어 앉아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나뭇잎이 구를 때면 가로수 사이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시 -시인 최영미-를 꺼내어 릴케의 을 다시 읽어 본다. 가을 저녁에 한번쯤 읊조려 보는 것이 어떠하리~

다시 읽는 시 2020.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