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에게 보내는 일기

51. 직장생활에 대한 유감(有感)

이노두리 2018. 9. 28. 11:41

813일 월요일

 

초임회 공지메시지가 날아 왔다.

93일 월요일 12시에 제이스 C.C에서 골프 모임을 갖고, 오후 630분에 저녁 식사모임을 한다는 통보다.

초임회 총무를 맡고 있는 ’K사장의 문자다.

초임회는 내가 20여년을 다녔던 직장 한국전기초자를 퇴직한 사람들의 O.B모임이었다. 그러나 골프 모임을 하면서 인원이 부족하게 되자, 이 사람 저 사람이 게스트로 참가하다가 아예 퇴직자 중 골프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확대하여 매번 20여명 이상이 참석하는 모임으로 재편되었다.

나도 그 모임의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정기적으로 분기 1회 모임을 한다.

총무가 문자를 날려 골프 모임에 참가할 사람을 모집하고, 골프를 치지는 않으나 저녁 식사 모임에는 참석하여 오랜만에 우의를 다지는 장이기도 하다.

 

나도 골프를 칠 줄 안다. 회사 생활 중엔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골프를 배우지 못하였으나, 프리렌서로 일하게 되면서 업무상, 그리고 마케팅을 이유로 슬그머니 골프를 배우게 되었었다.

지금은 골프채를 아예 골방 구석에 쳐박아 놓고 골프를 치러 나가지 않는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거나 일정 때문에 나갈 시간이 없다고 손사례를 친다. 가끔씩 초임회 저녁 식사 모임에는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옛 동료들이나 후배들을 만나거나, 옛 상사님들을 뵙고 안부를 여쭈어 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A 회사에 다녀왔다. ’중소기업 스마트화 역량강화사업컨설팅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돕기 위해서 였다구미세무서 옆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 왼쪽 코너에 자리하고 있는 조그마한 소기업이었다. 대표이사를 대신하여  ’J 기술고문'이 상담에 응해 주셨다. 내가 한국전기초자출신이라고 하니, 이 자리가 옛날 한국전기초자 2공장 자리 아닙니까...하고는 반색하였다.

그렇다. 구미시 공단동 173번지, 바로 이 자리가 옛 한국전기초자 2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컬러T.V와 컴퓨터 모니터 브라운관용 유리를 생산하였으나 폐업을 결정하고, 2012년 공장 터를 매각하였다 한다.

 

한국전기초자는 19743월 외국인 투자기업으로 등록하고, 197412부산공장(경남 양산군 일광면 한국유리 부산공장 내)을 준공하였으며, 19782월에는 구미시 공단동 150번지에 한국전기초자 제1공장을 기공하였고,

19802월에는 한국전기초자 제1공장을 준공하여 부산공장의 사원들이 모두 구미로 이전하였었다. 이 때 나와 옛 동료들이 부산에서 구미로 옮겨오게 된 것이였다.

구미로 이전 후, 사세가 확장되어 19948월에는 한국전기초자 제2공장을 기공하였으며, 19969월에는 제2공장을 준공하였다. 15,000여평에 달하는 제2공장을 건설하고 정상 가동할 때, 한참 땀 흘렸던 그 공장터였던 것이다.

이런저런 간판으로 바꿔 달고 일하는 조그마한 공장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보였다.

15,000여평의 공장 터를 분활하여 새로운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었으나, 쇠창살로 공장 정문을 걸어두고 풀들이 무성한 마당이 보이는 공장도 군데군데 보였다. 최근 들어 구미공단의 중소기업 사정들은 너무 어려워 졌다고 한다.

공장문을 닫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일터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장 폐쇄로 또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거나, 수많은 노동자들의 좌절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갈 곳도, 할 일도 없이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무심히 흘러 내가 19981월에 퇴직한 이후, 그 많은 변화를 솔직히 모두 기억하고 싶지 않다. (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19977월 노동조합의 77일간의 파업으로, 경영권이 대우그룹으로 넘어가고, 그리고 아사히그룹으로 또 넘어가고, 그 와중에 구조조정으로 근무하던 사람들도 뿔뿔이 헤어졌었다.)

 

 

중소기업정보역량강화사업 종합시스템(https://it.smplatform.go.kr)‘ 에 직접 신청하도록 도와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과제 심사가 끝나고 선정이 이루어지면, 컨설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한국전기초자를 퇴직한 이후, 잠시 퇴직자 모임한초회의 회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1,000여명의 퇴직자, 옛 동료들의 상호간 친목도모와 연락업무를 책임지고 일한 적이 있었다.

내 주위만 하더래도, 퇴직자의 5% 정도만 다니던 회사에서의 수입보다 더 나은 직종으로 갈아타고 일했으며, 10% 정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소식을 알 길 없었다. 나머지 85% 사람들은 중소기업이나, 소기업의 또다른 직종으로, 아니면 경비직이나 임시직으로 근무하며 보다 적은 수입으로 가계를 꾸려 나가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나는  컨설턴트의 길20여년 걸어왔다. 건강만 유지된다면 정년없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천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전기초자라는 직장생활의 근무 경력이 없었다면 컨설턴트의 길을 걸어올 수 없었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회사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었고, ‘혁신추진이라는 실무를 습득할 수 있는 찬스를 주었었고, 나를 질책하고 경쟁심으로 열정을 불타오르게 한 무수한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가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특히 아내의 인내심과 항상 참회하며 살아가도록 옆에서 기도해 준 일에도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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