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목요일
‘한번 직장은 평생직장’ 이라는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직장에 입사하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평생 직장을 보장해 주던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기초자(주)를 그만 둔 것은 1998년 1월 24일이었다. 1975년 3월 4일에 입사하여 22년 10개월을 근무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홀가분했다.
며칠 빈둥거리고 있으니 먼저 어머님이 걱정을 늘어 놓으셨다.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딸린 가족을 어떻게 먹여살리겠느냐 하는 것이였다. 49세 때 일 이었으니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일 만 했다.
아들이 18세, 딸이 17세, 한참 공부해야 할 나이였다. 대학공부도 시켜야 하고, 사회에 진출도 시키고 시집 장가도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미래가 불안하기도 하셨을 테다. 어머님 몸도 불편하시고, 아내는 몸져 누우신 모친을 보살펴야 하고...
지금 뒤돌아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 잘 나가던 회사가 노사분규로 장장 77일간 파업으로 힘들어졌었다. 파업이 끝난지 일주일 만에 최고경영층에서 주식을 매각하여 회사경영을 ’대우전자‘로 넘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쳤다. 새로운 경영자가 오고, 기존 경영층은 모두 물러났다.
’회사생활이란 무엇인가?‘ 라는 회의감이 생겼고 나는, 스스로 판단하여 사표를 던지고 한국전기초자를 떠났다. ’자진 사표‘인 셈이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이십여년을 쌓아왔던 내 열정을 다시 쏟을 판이 사라졌다는 절망감이 나를 괴롭혔다. 출근길에 뒷골이 댕기고 목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두통이 몰려왔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도피처를 찾아야만 했다. 누구를 돌아다 보고 회사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
머리도 식힐 겸, 책 몇권을 들고 ’水多寺‘ 에 몸을 숨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어머님을 설득하고, 다시 자신을 추스렸다.
한국표준협회에서의 비상근 컨설턴트의 길, ISO 품질시스템 인증 심사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일, ’이노시스템연구소‘라는 컨설팅 회사를 시작했던 일, 금오공과대학교외 여러 학교, 기업체에서의 전문강사로 활동했던 일 등 여러 방면으로 나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많은 일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밀려왔다. 가장 슬픈 일은 2000년 3월 21일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일이다. 어머님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일이 지금도 가슴 아프다.
아들도 대학을 졸업시켰다. 러시아에 어학 연수를 1년 다녀오느라 5년이 걸렸다. 물론 그 도중에 해병대를 지원하여 2년 몇 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하였다. 중국 심양에 가서 지내다가 2012년에 장가를 가고, 2013년부터 한국에 돌아와 지금은 구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딸도 전문대학을 졸업시켰다. 2007년에 시집을 보냈다. 딸, 아들을 낳고 구미에서 살고 있다.
1998년부터 따져보면, 올해 2018년 까지 격랑의 세월이었다.
-2000년 3월 21일 어머님(윤정선)이 돌아가신 일
-2007년 1월 5일 딸(정지혜) 시집보낸 일
-2008년 6월 24일 외손녀(하채율) 태어난 일
-2012년 10월 27일 아들(정윤태) 장가 보낸 일
-2014년 1월 13일 손녀 (정유나) 태어난 일
-2015년 1월 4일 장인(김봉식) 돌아가신 일
-2016년 10월 27일 외손자(하재윤) 태어난 일
-2017년 6월 27일 부산 동생 (정경석) 사망한 일.
-서울에 사시던 셋째 누님과 매형도 차례로 돌아가시고, 서울 사셨던 둘째 매형도 돌아가시고,
부산 사셨던 큰 누님도 돌아가셨다. ( 작은 형님, 부산 큰 형님, 아버지, 부산 큰 매형, 장모님은
1998년 이전 돌아가셨음)
남은 혈족은 부산 큰형수, 서울 둘째 누님, 서울 둘째 형님과 형수님, 부산 경석동생 제수그리고 막내 동생과 제수,
아내와 나 9명이 남았다.
컨설턴트는 ’프리렌서‘다. 나는 ’프리렌서‘로 살아남았다. 중소기업의 경영 및 시스템 컨설팅을 주로 해 왔다. 직장생활의 여러 과정에서 배웠던 실전(實戰)과 특히 혁신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일본 컨설턴트 ’이찌다‘ 선생님으로 부터 TPM 컨설팅을 3년 동안 전수(傳受) 받았던 현장 지도 방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야간으로 ’경북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던 학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나의 ’스펙‘이 되었다. 학력, 경력, 학습 및 끈기가 무기가 되었다. 2000년 12월 1일 부로 ’이노시스템연구소‘라는 간판을 달고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독립적으로 사업 및 경영상담업을 영위해 왔다.
직장생활을 그만 둔 후 20년을 잘 버텨왔다. 은퇴를 하지 아니하였으니 아직 현역인 셈이다.
<은퇴 후, 40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는 ’은퇴 자금은 은퇴 준비의 일부일 뿐이다. 돈만 있다고 은퇴 준비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오늘 구미 3공단에 있는 ‘C’라는 회사를 다녀왔다. SK하이닉스 2차 협력사로 ‘품질 혁신’을 지도해야 할 업체이다.
<SK Hynix Growing Up Together> 프로그램으로 사전 컨설팅 협의차 서울에서 내려 온 ‘세븐컨설팅’의 정 대표이사와 함께 문을 두드렸다. ‘세븐컨설팅’의 비상근 수석 컨설턴트로서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C 회사’의 ‘ 박 대표이사님은 앞으로 지도방향을 자세히 듣고 싶어하셨다. 나의 경력을 묻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신뢰한다는 의미다. 컨설턴트 18년차로 100여개 기업을 지도한 경력이 있다는 것과 “기업은 사람이다. 앞으로 현장 중심으로 지도하겠다”는 나의 설명을 듣고는 만족해 하셨다.
‘깊은 생각은 삶을 다치니
마땅히 운명에 맡겨야지
커다란 격랑속에서도
기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자네’
<인생> 이란 책에서, 중국의 베이징 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시고 향년 98세, 돌아가시기 전까지 책과 붓을 놓지 않으셨다는 정신적 스승, ‘지셴린’ 이 들려주는 단비같은 인생의 진리!이다. 나는 이 문구를 좋아한다.
일기를 쓰는 동안 아내는 벌써 잠이 깊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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