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가 있는 아침> 2007. 1. 2-1.3
오늘, 쉰이 되었다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 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리고 만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도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가 속맘으로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소리 내어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며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터는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 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다
사람들은 약속을 구부려 반지를 만들지요. 새해 아침 태양이 유난히 둥그런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설날 숫새벽 둥근 태양을 반지로 끼고 자기 자신과 약속을 해봅니다. 하자와 하지 말자 사이의 약속,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약속. 하지만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약속의 덧없음도 깨닫게 되지요. 대신에 자신이 파놓은 삶의 우물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하 많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할 일들. 그런 가운데 한여름의 땡감이 빛 맑은 연시로 바뀌듯이 뜨겁고 탁한 피는 말갛게 가라앉습니다. 그때 언뜻 깨닫게 되지요. 언젠가 자신은 자기 아이의 눈물방울로 맺히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게 바로 삶!
이런 詩
신동집
어깨에 잔뜩 힘을 준 詩
굳어서 뻣뻣한 詩
이런 詩가 손쉬워
사람들은 다들 좋아한다.
그릴 수도 있는 일
저마다 기호는 나름이니.
그러나 완전히 어깨를 푼 詩
비어서 비로소 가득한 詩
이런 詩를 낳기 위해선
아직도 끈질기게
살아 남아야 한다.
살아 남아서
아내도 자식도 미리 다 보내고
시린 노을의
불을 쫓는 수리도 닮아 보아야 한다.
그리곤 순순히 돌아 미쳐 보아야 한다.
바이없는 종국의
잠이 내릴 때까지.
구름에 뼈가 있던가. 물에 뼈가 있던가. 그럼에도 구름과 물은 누구보다 힘이 세다. 산을 뭉개고 교각을 쓰러뜨린다. 모름지기 뼈는 숨겨져 있어야 한다. 내공이 깊은 강호의 고수는 태양혈을 숨긴다던가. 예사로움은 뛰어난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 채근담에도 적혀있지 않던가, 大巧無巧術이라고. 너무나 세심하게 다듬고 끝마무리하는 사람은 참다운 예술가가 되지 못한다네. 담담한 구술체의 시를 외면하고 현란한 이미지에만 눈이 팔렸던 젊은 날이여. 언젠가 백담사에서 보았지. 화강암에 새겨진 고은 선생의 이 시 ;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 못 본/그 꽃
'다시 읽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무태나무, 사랑법 (0) | 2007.05.01 |
---|---|
이 땅에서만, 詩를 (0) | 2007.04.28 |
시가 있는 아침(2) (0) | 2007.01.21 |
고추꼭지를 따며 (0) | 2006.11.23 |
늦가을 비에 젖어 (0) | 2006.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