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할 일 없어 고추 꼭지를 딴다
열 근이나 넘는 고추 자루를 풀고 쏟아놓으면
고추는 서서 제 발로 걸어 나온다
마스크 쓰고 장갑으로 중무장한 아내,
고추 꼭지는 남자가 따는 것이 아니라고 손을 내젓지만
이쁘장한 고추가 불쌍하여
남자인 내가 달라든다
고추꼭지는 이렇게 따는 거야
시범을 보이는 아내야, 고추는 내가 더 잘 알지
남자인 내가 더 알지 퍼질고 앉아 고추를 잡는다
붉은 고추 꼭따리를 따니
고추씨가 나온다
색깔이 노랗구나 울 엄마 속을 닮았구나
울 엄마는 고추를 많이 낳았단다
딸 하나 낳으면 쫓겨난다던 옛날 종갓집,
고추 하나만 낳아서 길러주면 장땡인줄 알았는데
줄줄이 고추라서 밥상 앞에는 고추 반찬만 있었단다
섧디 섧은 고추잎 무침에, 맨밥 말아 풋고추도 된장에 찍어먹었단다
해마다 고추 꼭지를 딸 때면
말 잘 듣는 나만 시켰단다 엄마는
따면서 많이도 울었단다 착한 아들이 섧어서
그 아들이 고추 꼭지를 오늘, 아내와 함께
따며 우는 줄은 모르실 게다
저승에서 이 소식은 모르실 게다
2006.11.19 일요일
'다시 읽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무태나무, 사랑법 (0) | 2007.05.01 |
---|---|
이 땅에서만, 詩를 (0) | 2007.04.28 |
시가 있는 아침(2) (0) | 2007.01.21 |
시가 있는 아침(1) (0) | 2007.01.19 |
늦가을 비에 젖어 (0) | 2006.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