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시

고추꼭지를 따며

이노두리 2006. 11. 23. 21:33

일요일 할 일 없어 고추 꼭지를 딴다

열 근이나 넘는 고추 자루를 풀고 쏟아놓으면

고추는 서서 제 발로 걸어 나온다



마스크 쓰고 장갑으로 중무장한 아내,

고추 꼭지는 남자가 따는 것이 아니라고 손을 내젓지만

이쁘장한 고추가 불쌍하여

남자인 내가 달라든다



고추꼭지는 이렇게 따는 거야

시범을 보이는 아내야, 고추는 내가 더 잘 알지

남자인 내가 더 알지 퍼질고 앉아 고추를 잡는다



붉은 고추 꼭따리를 따니

고추씨가 나온다

색깔이 노랗구나 울 엄마 속을 닮았구나



울 엄마는 고추를 많이 낳았단다

딸 하나 낳으면 쫓겨난다던 옛날 종갓집,

고추 하나만 낳아서 길러주면 장땡인줄 알았는데

줄줄이 고추라서 밥상 앞에는 고추 반찬만 있었단다

섧디 섧은 고추잎 무침에, 맨밥 말아 풋고추도 된장에 찍어먹었단다



해마다 고추 꼭지를 딸 때면

말 잘 듣는 나만 시켰단다 엄마는

따면서 많이도 울었단다 착한 아들이 섧어서

그 아들이 고추 꼭지를 오늘, 아내와 함께

따며 우는 줄은 모르실 게다

저승에서 이 소식은 모르실 게다

 

 

2006.11.19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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