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 목요일
‘나이를 먹는다는 게 신체적인 불편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늙는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기도 하지만 , 초연하게 간직해야 할 어떤 세계이기도 하다.
이제 칠십 고개를 넘어서고, 아내는 육십고개를 넘어섰다.
서른 하나에 결혼하여 아들, 딸을 연년생으로 낳아 키웠다. 아내의 나이 24살에 시집와 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님과 아내 사이의 외줄 타기를 하며 나는 17년을 보냈다. 외줄의 평행선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지혜를 발휘해야 했다. 아내에게는 참으라 하고 어머님께는 이해해 달라고 졸랐다.
고부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여자의 일생이다.
어머니는 83세에 골다공증으로 척추뼈가 무너져 내려 병원치료가 힘들어졌다. 1년동안 집에서 꼼짝없이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욕창 치료, 목욕 간호를 아내 혼자 도맡아 했다. 아들로서 하지 못하는 일을 아내는 해냈다. 살아가면서 갚아야 할 평생 빚이다.
어머님이 하이얀 옷을 입고 먼길 떠나신지 어언 20년이 넘었다.
어머님이 보고 싶다~
어머니 생각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딸을 먼저 시집보내고 아들도 장가를 보냈다.
딸에게서는 열 살먹은 외손녀와 2살먹은 외손자가 태어났다.
아들네는 네살먹은 친손녀가 있다. 딸도 가까이에 살며 아들도 담장너머 뒷집에 산다. 아내를 제외하고 딸린 식구가 칠곱이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삶은 가족의 배부름이다.
그런데 아내가 아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살아온 것만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아왔다.
국내여행뿐만 아니라 해외여행도 부지기수로 다녀왔다. 국내여행은 애들 어릴때부터 철마다 전국을 누비며 다녔고, 결혼을 시킨 이후에는 가족여행이 조금씩 늘어나 새로운 재미를 주었다..
해외여행은 아내와 함께 다닌 햇수로만 열 번을 넘는다.
1996.4.8~4.13 (6박7일) 중국(상해-계림-북경)-근속20주년기념—10명(부부동반)
2007.7.8~7.12 (4박5일) 백두산(백두산-두만강-압록강)-금우회—8명(부부동반)
2011.4.14~4.18 (4박5일) 곤명(쿤밍)-운섭엄마, 호야네와 함께—5명(부부동반)
2011.12.30~2012.1.1 (2박3일) 심양(상견례)-아들 장가위해 —2명(부부동반)
2013.4.23~5.1 (8박9일) 청두(청두-심양-귀국)-중국 사돈 초청—6명(사돈, 아들내외 포함)
2014.5.16~5.20 (4박5일) 중국(심양)-아들 이삿집 구경 및 사촌 결혼식—2명(부부동반)
2015.3.11~3.14 (3박4일) 중국(심양)-유나 백일 기념—2명(부부동반)
2015.10.28~10.31 (3박4일) 중국(장가계 원가계)-심인당 해외여행—27명(부부동반)
2016.1.26~2.2 (6박7일) 태국(방콕-아유타야-치아마이)-사진반 출사—6명(부부동반)
2017.3.17.~3.23 (5박7일) 유럽(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패키지 여행—31명(부부동반)
국내여행까지 합치면 사진파일로만 500GB가 넘게 저장되어 있다.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국내여행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특히 중국여행이 많은데 그 이유는, 중국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한 탓이다.
아들이 한국에 유학 온 아가씨(張茜)와 사귀어 몇 년간 중국에 가서 살았다.
장씨 성을 가진 한족(漢族)으로 한국사람과 사귄다니까 아버지 반대가 심하여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결혼하겠다고 하여 양가 상견례(相見禮)를 하려 우리 부부가 심양으로 갔다.
결국 2012년도 가을에는 한국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이후 심양에 가서 몇 년 살았는데, 양가가 서로 몇차례 갔다 왔다 하였다.
중국에서 손녀가 태어나고, 유나(鄭有那)라 이름지었다. 중국어 발음도 유나다. ‘아름답게 크라’는 뜻이다.
유나는 지금 한국에 와서 살고 있다. 물론 며느리도 한국에 와서 아들과 함께 지낸다.
유나가 100일을 지난 후에 우리 아기를 보기 위해 첫걸음으로 중국에 갔었다. 이쁘게 자라있었다.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한국에 와서 살아보도록 권유하였다. 2015년 7월의 일이다.
네살배기 유나는 어린이집을 다니는데 그 재롱이 정말 귀엽다. 끽끽거리고 깩깩거리고 무릎보다 높은 곳이면 그저 올라가 춤추고 노래하기를 좋아라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건강은 실제 웃음의 양에 비례한다’하니 치료제인 셈이다.
엄마에게서 중국어를 배워 말하기는 서툴러도, 듣기는 할아버지보다 훨신 낫다. (나는 과거에 중국어 학원에서 중국어 초급을 조금 배웠다)
아들과 며느리가 엄마 병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알아본 모양이다. 중국에는 유나 엄마의 사촌 언니가 醫師라고 한다.
중국 상해에 ‘중성자치료센터’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서 치료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 치료비가 상당한 고가이며, 치료를 받으러 가는 절차도 까다롭다. 그래서 양성자 치료를 하는 국내병원을 찾다가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센터에 진료 예약을 하면서 지금 함암치료도 그 병원에서 하기로 결정된 연유다.
그동안 암에 대하여 국내의료기관들도 많은 연구를 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꿈의 암치료기 ‘양성자 치료기’가 국내에서 암 환자 치료에 쓰인지 11년이 되었다 한다. 2007년 국내 최초로 양성자 치료기를 도입한 국립암센터에서는 지난해까지 총2,478명이 치료를 받았다 한다. 치료 성과도 일단 성공적이라는 평가다.
아내는 아직 양성자치료를 받을 수 없다. 췌장암이나 담도암, 소아암, 생존율이 낮은 간암 등에서 매우 우수한 치료효과를 보였다고 한다. 양성자치료는 ‘기존의 X선이나 감마선을 이용한 방사선치료와 달리 원하는 깊이에서 흡수 후 급격히 사라지는 브래그피크라는 양성자 혹은 중성자가 갖는 물리학적 특성을 이용해 암세포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주변 정상조직의 손상을 줄여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성자치료보다 중성자치료가 좋다 혹은 뛰어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중성자치료기는 아직까지 1대도 국내에 설치되지 않았으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2022년에 도입 전망이라고 한다.
가격도 양성자에 비해 중성자가 3~5배 가량 비싸다고 한다.
아들과 딸, 그리고 며느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고마우나, 엄마에게는
지금 항암치료에 충실하여 효과를 보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그동안 힘들었던 진통이 줄어들었다 한다. 일년 가까이 먹어왔던 진통제를 이제는 먹지 않는다. 천만다행이라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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