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의 일이다. L.A에 이민간 동창녀석이 대구에 왔다고 얼굴 한번 보자기에 구미에서 대구로 갔다. 마침 결혼식에 참석차 대구에 갈 일이 있어 그러마하고 약속을 한 터라 잠깐 축의금만 전하고 성서에 사는 그 친구 집 쪽으로 코스를 틀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는지,얼마나 반가웠는지, 여자 친구 세명이 반갑다고 호들갑을 떨고, 일행은 마침내 동해안쪽으로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동창이야 원래 반갑다지만 이제 이순(耳順)이 넘은 나이에 남녀가 유별한가, 대구에 사는‘춘선’이야 한번씩 전화통화도 하고 만나기도 하지만, 서울서 온 ‘말년’이는 몇 년만이라 반갑다고 치고, L.A로 이민간 ‘경주’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처음이라 약간은 낮설었다. 한참이나 쳐다보고야 옛날 얼굴이 뇌리에서 돌아와 사십여년전의 기억이 돋아났다. 벌써 40년이나 흘렀단 말인가?
차는 어느 듯 포항을 지났고, 동해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았는지 묻고 답하고...옆자석에 앉은 ‘경주’는 초등하교 1학년때부터 단짝이었던 얘기, 2학년때 병원놀이했던 얘기며 심지어 ‘천일동’선생님이 1학년때 담임선생님이셨다는 것까지 너무나 많은 기억들을 더듬어내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12년을 줄곧 같이 나온 동창(男女共學)이다 보니 할 얘기는 끝이 없었다.
이야기는 주로 부모님은 살아계시는가? 형제간은 잘 사는지? 지금 뭘하고 사는가? 로 이어져갔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생각에 운전대를 잡은 손이 풀려 차가 뒤뚱거리기도 했다.
동해 ‘삼사해상공원’에 들러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연인들처럼 산책도 했다. 봄바람은 바다로부터 올라온다고 했는가? 바람은 어느덧 훈풍이다. 알맞게 얼굴을 간질이고 오랜만에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은 설레기도 했다.
강구항쪽으로 방향을 틀어 길을 들어서자 온통 대게를 팔고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 겨우 길을 비집고 차를 세워두고 등대쪽으로 내려갔다. 바다는 고향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고향은 금방 우리곁으로 왔다. 아! 장승포, 내 고향에는 빨간등대, 흰등대가 있어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 내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이범선’의 ‘갈매기’에 등장하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포구가 정말 아름다웠다. 힘들고 괴로울 때면 등대에만 가면 힘이 불끈 솟아나 휫바람을 불고 돌아오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어시장에서 대게 몇 마리를 사는 동안, 김이 푹푹오르게 대게를 찌는 그 기다림의 시간에도, 2층 바다가 보이는 창쪽에 앉아 대게를 먹는 그 순간에도 창밖 포구에는 갈매기가 날아오르고, 추억은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계속 따라왔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피곤해보였다. 그때야 그녀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려졌다. 이번 여행으로 한국에 몇 년만에 온 이유도 치료약을 구하러 왔다는 것과, L.A에서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 등을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 헤트라이트 불빛에만 눈을 준채 말없이 달렸다.
대구에 도착하자마자 노래방엘 가야 한다고 ‘춘선'이가 앞장서는 바람에 집근처 노래방에 들렀다. ‘경주’는 거의 한국가요를 몰랐다. 일부러 자청하여 가곡을 부르기로 했는데 ‘가고파’‘바우고개’를 함께 불러 학창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끝내 그녀는 타향에서의 아픔과 속마음을 툴툴 털어버리지 못하는 듯하였다. 스물일곱 나이에 시집가 미국으로 이민 간 이야기며, 봉제공장을 하다 부도난 이야기며, 3년 전에 남편을 사별했다는 것, 다음 달에 딸이 미국 청년과 결혼한다는 것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향에서의 인생살이는 어느새 반주소리에 놀라 윙윙거리고 동화속 먼 곳 이야기처럼 들렸다. 흰머리 몇 올이 그녀의 귀밑에서 예쁘게 보였다. 벌써 이런 나이가 되었나?
아내가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고 늦은 밤, 구미로 돌아왔다. “내일 모래쯤 L.A로 돌아 간다”는 인사말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작별인사처럼 들렸던 것은 왜일까? “너는 나의 첫사랑이었데이...”
-<대구신문 2012년 3월 12일 22면 기고란>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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