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금요일
하기휴가 계획이 갑자기 틀어졌다. 이 무더위에 대식구가 몇시간씩 차량으로 움직여 동해안 봉평해수욕장까지 가는 것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아들의 의견이다. 이 더위에 텐트치고 바닷가에서 보내는 것도 무리라는 주장에 손을 들었다. 그래, 이번 가족 하기휴가는 무기연기다.
대안으로, 처가에 가서 1박 하고 오자고 아내를 달래 보았다.
아침 일찍 아내와 단둘이 길을 나섰다. 떠남은 바캉스, 그냥 비우는 것이다. 아픔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마음인 게다.
네비게이션에 ‘진하해수욕장’을 입력했다. 이왕 부산(기장)으로 내려가는 김에 바닷가를 둘러 가고 싶었다. 진하해수욕장에 당도하니 백사장에는 피서객들이 비치파라솔 아래서 삼삼오오 8월의 더위를 즐기고 있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파도위를 미그러져가는 바나나보트위의 젊음들, 바다는 들뜬 사람들을 한없이 품고 있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았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라서, 기장이라는 동네가 우리를 엮어 놓았다.
중매결혼으로 아내와 연을 맺은지 벌써 사십년이 되어간다.
1979년 1월 4일이 결혼기념일이니까 내년 1월 4일이면 만 40년이 된다.
한국유리 부산공장(구 동성판유리)에 근무하게 되면서 출퇴근이 가능한 기장읍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기장에살다 보니 인연이 닿아 기장처녀와 결혼으로 골인했으니 대단한 인연이 아닌가.
결혼 후 얼마되지 않아 회사가 구미공단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우리 부부도 자연히 구미로 거처를 옮겼다. 신혼살림은 8평짜리 전셋집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코딱지만한 방 2개에 달랑 부엌 하나, 둘이 꼭 껴안고 자야만 했다.
6개월 후, 회사에서 제공하는 17평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면서 형편은 좀 나아졌다.
아들, 딸 낳고 홀로 되신 어머님도 모시고 살았던 때가 행복했다.
그 후 32평 아파트로 옮겨 살아온 지도 근 30년이 되어 가지만, 언제나 나의 제2의 고향은 기장이다.
아내의 고향이기도 한 기장 동네는 어촌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동네였다.
처남은 미리 에어컨을 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장 중학교 후문 근처이다. 몇 년 전, 옛날 살던 집을 팔고 장인이 직접 지어 이사해 온 2층집 주택이다.
누나가 좋아하는 회를 시켜놓고 매운탕까지 손수 준비하여 상차림을 하여 왔다. 오랜만에 처남과 함께 하는 자리였다. 작년 겨울 장인 제삿날에 온 이후로 몇 개월 만이다.
아내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연신 입술을 만지작 거린다. 맵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회를 먹으면서도 초장(醋醬)의 매운 맛이 입가를 따끔거리게 한다고 안절부절한다. 결국 음식을 채 다 먹지도 못한채 아내는 눈물을 보인다.
모처럼 친정에 오니 옛날 생각이 나서 일 테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썰렁한 친정에 와 있으니 외딴 섬에 와 있는 기분일 테다. 장모님이 암으로 돌아가신 후 장인은 홀로되시어 20여 년을 사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내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한다. ‘김 대목’하면 동네사람들이 다 알아주는 이름난 대목(大木手)이셨다 한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세는 기울었지만 딸 다섯에 아들 둘, 그 많은 식구를 다 키우시고 시집 장가 보내었으니 쌀뒤주가 바닥이 보일 만도 하였을 것이다. 옛말에 ‘딸셋 시집보내면 문 열어두고 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기사 “영감은 술 좋아하시고 친구 좋아하셨으니 거들난다”는 말도 거짓은 아닐 것이지만...
연세도 많으셨고, 시골 경기의 불황으로 차츰 힘이 들었다 한다.
옛날 살던 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어둑해진 탓도 있겠지만 도무지 동서남북을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딱 들어맞는 말일 테다.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 있는가, 아내와 나는 어둠속을 몇바뀌 헤매었다.
옛날 처가에는 환한 달덩이같은 장모님이 계셨다.
“우리 정서방 왔나” 로 시작되는 다정한 말씀들, 닭잡아 내어 놓으신 음식들,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어 골목길 담장 너머로 팔짝팔짝 넘어갔었다. 개구리 울음 시끄러웠던 개울도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숲, 반듯반듯하게 생긴 울타리들이 침범하여 우리의 과거를 가두어버렸다. 우리가 걷던 오솔길도 온데간데 없었다. 그 곳에 새로 이주한 신도시인들이 우리의 추억거리를 모두 먹어버린 것이었다. 횡~ 하니 지나가는 오트바이 불빛이 더욱 우리를 낮설게 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늙어 버린 것인가, 세상이 이렇게 바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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