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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보는 마음

이노두리 2006. 12. 24. 08:32
 

   겨울을 보는 마음


 나에겐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중학시절 백일장에서 장원(壯元)으로  입상하여 상을 탔던 기억이다.


  지금도 그런 행사가 있는지 궁금하나, 시골 교정 군데군데에 가을 햇살을 피하여 푸라다나스 그늘에 앉아, 시제(詩題)에 맟춰 써낸 글이 ‘겨울을 보는 마음’이었다. 국어선생님이셨던 김재호 선생님은 그 이후에 현대문학에 등단하셨던 시인으로, 중학생에게 그렇게 어려운 시제를 주시다니... 

 아무튼 ‘하늘’이나, ‘구름’ 등 쉽게 쓸 수 있었던 시귀가 아니라서, 이래 저래 ....겨울을 기다린다  정도였으리라. 그 길로 나는 문학소년인 양, 좀 모자를 삐닥하게 쓰고 걸음도 약간 느리게, 아래 주머니에 한쪽 손을 푹 지르고 걸었으리라.

 

 그 뒤 국어시간에, 나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도맡아 읽었던 기억이 있고, 가끔 그 선생님의 방에 찾아가 ‘현대문학’이라는 문예지를 대했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자오문선론(慈烏文選論) 1)이라는 시로 등단하셨다고 기뻐하셨으니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선생님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나는 시를 잃어버렸으며, 소식도 묻지 못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었고, 겨울이 슬그머니 다가왔으며, 직장생활을 하며 까페에서  가끔씩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어느 날 마산이 고향이라는 이웃 직장의 전무님이 옆자리에서 부르신 노래가 ‘고향의 노래’였었고  그는 가곡을 누가 많이 알고 있는지 내기하자시면서 “국화꽃 저버린......”을 맛들어지게 부르셨던 것이다. 그 노래를 가끔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가사를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가 하신 말씀이 나를 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노랫말을 지으신 분이 김재호라는 분인데, 그가 마산 사람이며, 그의 친구인 이수인작곡가에게 보낸 편지속 끼워보낸 詩에 曲을 붙인 것이랬다.  고향바다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바깥에 나와 찬바람에 술기운을 깨우고 다시 들어가 그분이 옛날 은사였으며, 그가 나를 국화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셨다는 말을 하고는 그 길로 가사말을 배우게 되었다.


국화꽃 져 버린 겨울 뜨락에

창 열면 하얗게 뭇서리 내리고
나래 푸른 기러기는 북녁을 날아간다

아 이제는 한적한 빈 들에서 보라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고향 길 눈 속에선 꽃등불이 타겠네


 누구나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추억 한두가지는 먹고 살아갈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괜스레 마음이 바빠지고, 편지라도 한편 쓰고 싶고, 먼데 있는 사람을 만나고도 싶고, 어느 한가한 저물녁에 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을 게다.  해마다 그 추억이 먼발치에서 두근거리며 오면, 그때마다의 상념때문에 잠을 설칠 때도 있다. 오늘은 추억 때문에 바람처럼 마음을 졸인다.


 이제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뀐 지금, 꼭 찾아뵈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고향 같은 안부, 그 안부를 만나고 싶다.




1)자오 [慈烏]

[명사]<동물> =까마귀




-2006.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