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후 만덕산 백련사로 향했다.
백련사는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801-888)가 창건했다 하나, 1211년(고려 희종 7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 스님이 옛터에 중창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120년간 고려 8분의 국사(원묘국사, 정명국사, 원환국사 등)를 배출하고 번창하였으나, 고려말 왜구가 3차례나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을 때 폐허지경에 이르러 , 이후 1430년(세종 12년) 에 행호대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 20동과 서원 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을 쌓고 8년간 수륙제를 지내며 수행을 했다고 하며
백련사에서 고려때 8국사가 나왔으며, 8종사는 조선시대 배출되었다는 큰 절이었다 한다.
다산초당에 적거하였던 다산 정약용은 혜장선사(1772-1811)와 교류하며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며
마음을 평안을 얻었다고 전해 진단다.
때마침 문화해설사가 나와 우리 일행에게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고
그 짧은 시간에 백련사의 역사와 다산초당 가는 길을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법당에 들러 예를 올리고 우리 부부는 기념촬영을 한다.
구강포가 내려다 보여 시원하다.
동백림이 병풍처럼 절을 안고 있어 천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장관이라고 하나, 지금은 동백꽃 망울만
볼 수 있을 뿐 3~4월을 다시 기약할 수 있을까?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백련사 가람배치가 위압적이라는 것과 때로는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불친절한 인상을 주는 곳이라고 혹평(?)하였지만 해묵은 배롱나무, 7월에 피어 100일동안 자태를 뽑내었던
꽃잎들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있자니... 인생 무상이다.
문화해설사의 말대로 백련사에서 왼쪽으로 돌아 다산초당으로 길을 재촉한다.
다산초당까지의 길은 잘 뚤려져 있으나 오르막 내리막으로, 한여름은 지났지만 숨이 차고 등줄기에 땀이 배인다.
백련사에서 900m여의 길이라고는 하나 돌뿌리가 발에 걸리고 바쁜 걸음으로 가다가는 힘에 부친다.
차밭도 지나고, 강진만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다행히 숲길이라 가을 정취는 있었지만 오르막은 힘들고 내리막은 한결 수월하다. 우리네 인생길 같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유배되었을 때, 11년간을 지내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한 곳이다.
숲에 둘러쌓여 오후인데도 약간은 어둡고 적막하기도 하다. <다산동암>을 거쳐 <다산초당>에 이른다.
해설사와 함께 다산초당에 대한 설명을 듣는 일행 몇간도 지나친다.
나도 평생에 다산초당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깊이 생각지 못했다.
지도상으로 강진을 보았을 때는 들판이나, 돌아나가는 길목어귀 어디쯤에 다산초당이 있겠지 하고 지나쳤던
적이 몇번이었던가, 정말 와서 보니 참으로 고즈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11년간을 지내며 어떻게
세월을 참아내셨을까 ? 갑짜기 다산 선생이 존경스러워졌다.
작은 연못, 다산이 직접 돌에 새겼다는 정석(丁石), 다조까지 구석구석 다산의 숨결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이 곳에 유배되었을 때, 11년간을 지내며 그 많은 책을 저술하며 보내셨다니... 책 한권도 내지못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해가 지기 전에 <강진만생태공원>으로 또 길을 재촉한다.
가을님은 어느새 차 트렁크에서 삼발이를 끄내어 메고 나선다. 일몰 장면을 카메라에 멋지게 담을 요량이다.
자연이 살아있는 생태 뻘에서 짱뚱어 노는 것도 보고 갈대숲에서 이는 바람소리도 듣고...
노을은 나를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롭게 풀어 놓아주었다.
강진만 갯벌에서 잡아올렸다는 짱뚱어탕으로 저녁을 채운다.
몇 시쯤 되었을까?
숙소인 <사의재 한옥체험관>으로 돌아와 강진에서의 하루를 이렇게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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