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팔 불교 성지순례 여행기

인도네팔 불교성지순례-여행 넷째날-보드가야(부다가야)에서 라지기르,나란다.파트나로

이노두리 2025. 1. 27. 21:30

4일차----1115() -보드가야(부다가야)에서 라지기르, 나란다, 파트나로

-05:00 모닝콜, 06:00 아침 공양, 07:00 호텔 출발이다.

 

새벽 3시에 잠이 깨였다. 어제 저녁 9시부터 잤으니까 6시간 잠이면 충분하다. 혼자 독실을 쓰니까 편하다. 아무도 관섭할 사람이 없다. 밤에 한번씩 잠이 깨여도 혼자 여유롭다. 다만, 모기 한 마리가 귓가를 ~”하고 맨돌아 일어났다. 모기기피제를 찾아 뿌리고 귓가 모기 물린 곳에 약을 바르고 다시 잠을 청했다. 보드가야는 시골이라서 그런지 자연이 살아있다. 어제 저녁 호텔측에서는 모기퇴치를 위해 훈증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모기 한 마리가 용케도 내 방에 들어와 숨어 있었는가 보다. 다시 잠을 청하였으나 왼쪽 발목에 쥐가 나서 통증이 왔다. 가지고 온 수지침을 꺼내어 발가락을 찔러 피를 조금 짜 내고야 진정이 되었다. 여행은 이래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한국시간으로는 아침 7시 경이라 생각되어 아내에게 카톡으로 여행 중 찍은 단체사진 1장과 보드가야 리조트에서 찍은 독사진 1장을 보내며 여행 경과보고(?)를 하였다. 아내도 같이 인도여행을 왔으면 어떠했을까를 다시 생각했다. “미안해요...” 하고 카톡을 보냈다. 같이 왔으면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을텐데 하고 생각했다.

오늘부터는 셀카봉을 꺼내 내 사진도 직접 찍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휴대폰 모닝콜이 울린다. 0430분이다. 매일 호텔 모닝콜보다는 30분 일찍 휴대폰 모닝콜을 해 두었다. 아침 염송도 하고 서둘러 준비를 하기 위해서다. 혼자이니까 시간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지기르가 가는 길에 강가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여 인도식 목욕을 하는 장면을 차장으로 목격하였다. 도로를 꽉 메운 오토릭샤, 오트바이와 도로가에 걸어가는 인파 때문에 전용버스도 거의 멈춰있기도 한다.

 

 

 

지도상으로 검색해 보니 팔구강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겐지스 강 줄기 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라나시에서 보지 못한 (밤이었기 때문...) 인도인들의 강에서의 목욕 장면을 운좋게 보았다. 남녀 노소 때를 이룬 이 장면을 정말 재미있게 보고 사진도 찍었다. 인도인들의 그 순수한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축산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가 알려준대로 영축산을 오르는 길목에는 길 양쪽으로 구걸하는 사람들과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셨다는 영축산, 다리가 아픈 사람을 위하여 혼자 탈 수 있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사람도 있다. 무릅이 불편하신 상광원 전수님은 가마를 타고 어깨에 가마를 메고 오르는 가마꾼에게 오히려 미안해 하셨다.

오체투지(五體投止)로 영축산을 오르는 수행자들도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살아있는 부처님 고타마 싯달타에게서 존귀한 품성이 있음을 읽어내고 영축산 위에서 날마다 불법을 설하는 부처님을 만나려 산 길을 올랐다고 한다. 당시 왕의 행차로 언덕 오르막 길이 닦여 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산에 오르는 길에 있는 바위가 신기하게도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꼭대기에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 영취산, 또는 영축산이라고 한다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옛날 어찌하여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을까? 문헌을 찾아보니, 영축산 이곳 주변 경치와 평화로운 환경 때문에 tgodwkemf이 명상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한다. 붓다께서도 홀로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이곳에 와서 머물렀다 한다. 붓다께서 이곳에 머물 때 수많은 방문객이 와서 질문을 했다 한다. -인도 불교성지순례 가이드, 무념에서 인용-

 

영축산에서 내려와 불교 최초의 사찰이었다는 죽림정사로 향한다.

빔비사라 왕이 붓다와 승가를 위해 땅을 물색하고 수행하기 적합한 이 땅에 승원을 지어 보시하였다는 죽림정사, 대나무로 가득하였다. 죽림정사에서는 불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한다. 여기에서 제자들의 대집회가 열린 것이다. 사르나트 녹야원에서 첫 안거를 보낸 다음해 음력 1월 보름이었다 한다. 금강경의 서두에 나오는 1250명의 아라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한다.-인도 불교성지순례 가이드, 무념에서 인용-

 

 

 

빔비사라 왕 감옥터에도 들렀다.

빔비사라 왕은 15세에 왕위에 올라 52년간 통치했다고 한다. 그는 붓다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이 된 후로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다 아자따샷뚜라는 태자는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주지 않는 것에 앙심을 품고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었다 한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에 조바심이 난 아들은 결국 존속살해의 범죄를 저질렀다 한다.

 

 

 

인도 최초 불교 대학인 나란다 대학터로 이동한다.

현장이 쓴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나란다 승원은 굽타 왕조의 샤끄라디따야 왕(415~455)이 창건했다고 전해 진다. 현장은 635년에서 639년까지 5년을 머물렀다 한다. 현장의 시대에는 8,500명의 학생과 1,500명의 교수가 있었다 한다.

나란다를 승원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대학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 승원의 교과과정이 불교 경전과 교리, 불교 철학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바라문교 경전과 교리, 세속의 학문, 논리학, 문법, 점성학, 의학 등을 가르치는 종합대학의 성격 때문이라고 한다 나란다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은 스님들뿐만 아니라 속인들도 있었다 한다.

 

그 규모와 크기가 대단하다. 거대한 불교 교육기관인 나란다가 불교의 영광에 이바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쇠퇴에도 기여했다. 스님들이 거대한 울타리 안에 모여 살면서 궁중의 후원에만 의지했기 때문에 승가와 재가와의 접축이 점점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커리큘럼에 힌두교의 주술과 의식이 점점 더 많이 포함됨에 따라 대승불교가 생겨나고 밀교가 생겨났다. 그리고 마침내 힌두교와 차이가 사라져바렸다 한다.  그때, 외부적 요인으로 무자비한 무슬림 파괴자들이 북인도를 휩쓸었다. 힌두교 부할로 세력이 약해진데다가 무슬림의 일격으로 불교는 그만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무슬림 군대는 살인과 약탈 그리고 파괴에 미친 잔인한 아프칸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든 힌두 사원과 불교 사원이 불타버렸으며,힌두 사제들과 불교 스님들이 모두 죽임을 면치 못했다 한다. 그들의 약탈과 파괴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정도의 참극이었다 한다힘의 논리에 의한 참극은 지금도 세계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란다에는 숙소가 없다. 우리 일행은 오후 2시경 나란다를 출발하여 1830분에 파트나에 도착하였다. 4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다. 파트나는 지하철 공사로 인해 도로체증이 심하였다. PATALIPUTRA CONTINENTAL 호텔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하였다. 파김치가 된 하루였다. 하루 12,077보를 걸었다고 만보기가 알려주고 있었다. 샤워 후 20:00시에 잠들다. 내일도 04:00시에 모닝콜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파트나를 떠나 바이살리, 케사리아를 거쳐 부처님의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로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