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11 신년음악회-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 프란츠 벨저-뫼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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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신년음악회의 역사=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듬해인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2011년으로 72주년을 기록한다. 비엔나 신년음악회는 매년 1월 1일에 열리지만, 첫해인 1939년에만은 12월 31일에 열렸다.또한 1939년의 음악회는 ‘신년음악회’가 아닌 ‘특별연주회’(Ausserordentiliches Konzert)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렇지만 이를 제1회 '비엔나 신년음악회'로 간주한다. 1939년 ‘특별연주회’의 지휘자는 클레멘스크라우스(Clemens Krauss)였으며, 당시 프로그램은 순전히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작품으로만 구성되었다.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예정된 프로그램이 끝나면 적어도 세곡의 앙코르 연주를 듣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지만, 제1회인 1939년의 연주회에서는 앙코르가 없었다. 그러므로 1939년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이 연주되지 않았다. 앙코르가 없이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진행된 것은, 1939년부터 세계2차 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까지 그러했다. 오스트리아의 제2의 국가라고 하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비엔나신년음악회에서 처음 레퍼토리로 포함된 것은, 아직도 전쟁 중인 1945년 1월 1일의 연주회에서였다. 그것도 앙코르 곡으로였다. '신년음악회’의 앙코르 곡으로 빠지지 않고 있는 <라데츠키 행진곡>의 연주는, 1946년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이 1945-46년 이후, 매년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었던 것만은 아니다. 간혹 두곡 중에 한곡이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두곡 모두가 ‘신년음악회’의 단골 앙코르 곡으로 올라서게 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말하자면, 그 이전에는 앙코르 곡으로 연주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초창기부터 상당기간 동안 신년음악회를 지휘해온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무슨 생각인지 ‘무궁동’(Perpetuum mobile: 無窮動)이라는 곡을 항상 정식 프로그램에 넣었다. 사정이 있어서 ‘무궁동'이 정식 프로그램에서 빠지게 되면, 앙코르 때에 반드시 연주했다. 아마 비엔나신년음악회가 영원무궁토록 발전하기를 바라서였던 것 같다. 비엔나신년음악회는 지금까지 70년이 넘는 연륜을 기록하면서, 단 한번 거른 적이 있다. 바로 1940년, 전쟁의 회오리바람이 너무 거세어 중지되었다.
비록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와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신년음악회를 마무리하는 관습이 있었지만, 간혹 지켜지지 않는 해도 있었다. 1967년 빌리 보스코브스키(Willi Boskovsky)가 지휘했을 때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본 프로그램의 순서로 넣었기 때문에 앙코르 곡이 되지 못했고, 로린 마젤이 지휘하는 2005년 신년음악회 때에는 바로 며칠 전 동남아를 휩쓴 인도양의 쓰나미 희생자들을 추모하여 박수치며 즐거워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앙코르에서 제외했었다.
1936년부터 1979년까지 비엔나 필하모닉의 악장이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1955년부터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 시작하여 197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25년 동안 지휘함으로서 비엔나 신년음악회의 기념비적인 존재가 되었다. 원래 1939년부터 시작된 신년음악회의 지휘는 대를 이어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가 지휘했다. 그 관습이 깨진 것은 빌리 보스코브스키가 건강상의 이유로 바통을 내려놓은 다음해부터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지휘자로서는 처음으로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로린 마젤은 1987년까지 7년간 신년음악회를 지휘하면서 비록 오스트리아 사람이 아니었지만 비엔나의 전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987년부터는 비엔나 필 단원들이 투표하여 해마다 다른 지휘자를 초빙키로 했다. 베를린의 허버트 폰 카라얀을 지휘자로 초빙하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선택했다는 얘기도 있다. 비엔나 필 단원들은 솔리스트도 투표로 초청하였다. 예를 들면 50주년 때에는 투표를 통하여 크리스타 루드비히(Christa Ludwig)를 솔리스트로 초청하였다.